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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는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4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입니다. 저는 뮤지컬 장르를 원래 잘 안 봅니다. 갑자기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이 어색하게 느껴져서요. 그런데 이 영화만큼은 보면 볼수록 다른 감정이 쌓였습니다.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는 것,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영화입니다.
뮤지컬 넘버가 어색하다고 했다가 말을 바꾼 이유
일반적으로 뮤지컬 영화는 감정이입이 어렵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대사 대신 노래가 나오는 순간 몰입이 끊긴다는 느낌 때문에 장르 자체를 피해왔습니다. 그런데 라라랜드를 처음 보다가 어느 시점부터 그 어색함이 사라졌습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제가 미아와 세바스찬의 상황에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뮤지컬 넘버(Musical Number)는 단순한 볼거리가 아닙니다. 뮤지컬 넘버란 극 중 인물이 일상적인 대사 대신 노래와 춤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을 말합니다. 라라랜드에서 이 뮤지컬 넘버는 두 인물의 내면 상태를 직접 보여주는 장치로 쓰입니다. 보랏빛 야경 아래 춤을 추는 장면이나 별이 쏟아지는 공간에서의 키스 장면이 현실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두 사람의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현실의 물리 법칙이 잠깐 멈추는 것처럼 연출되는 겁니다.
데이미언 채즐 감독은 이 영화에서 고전 할리우드 뮤지컬의 미장센(Mise-en-scène)을 의도적으로 차용했습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 앵글, 조명, 배우의 위치, 세트 디자인 등 화면 안에 담기는 모든 시각적 요소를 연출자가 배치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제가 이 사실을 처음에 전혀 몰랐던 것이 솔직히 말하면 좀 창피했습니다. 두 번째로 보고 나서야 "아, 이 장면들이 일부러 비현실적으로 설계된 거구나"라는 걸 알아챘습니다. 그때부터 이 영화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꿈과 사랑이 충돌하는 순간, 캐릭터 아크가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은 헌신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실제로 꽤 복잡한 문제입니다. 세바스찬이 재즈를 포기하고 팝 밴드에 합류하는 장면을 보면서, 저는 이게 헌신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를 서서히 망가뜨리는 선택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관계 때문에 억지로 하는 상황, 주변에서도 종종 목격했던 일이라 그 장면이 유독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구조는 서사 기법으로 보면 드라마틱 아이러니(Dramatic Irony)에 해당합니다. 드라마틱 아이러니란 관객은 상황의 전모를 알고 있지만 등장인물은 모르는 채로 행동하는 서사 기법을 말합니다. 관객은 세바스찬이 미아를 위해 선택을 바꿨다는 사실을 알지만, 미아 눈에는 그것이 배신처럼 보입니다. 그 어긋남이 두 사람의 다툼 장면을 유독 가슴 아프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것도 그 어긋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갈등의 결과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만들어집니다. 미아가 오디션 현장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관점에서 핵심입니다. 캐릭터 아크란 영화나 소설에서 등장인물이 이야기를 거치며 내면적으로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미아는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했던 지망생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꺼낼 수 있는 예술가로 변모합니다. 그 변화를 이끈 것이 세바스찬과의 관계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연애는 실패한 로맨스가 아닙니다. 서로를 완성시킨 관계라고 저는 봅니다.
꿈과 사랑이 충돌하는 장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세바스찬이 팝 밴드에 합류하는 장면: 사랑을 위한 타협이 꿈의 포기로 이어지는 순간
- 미아의 1인 연극이 실패로 끝나는 장면: 현실의 냉혹함이 꿈을 잠식하는 순간
- 두 사람이 말다툼 끝에 헤어지는 장면: 서로를 위한 선택이 서로를 상처 입히는 순간
- 미아가 오디션에서 홀로 노래하는 장면: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미장센이 이 영화의 진짜 힘이었다
라라랜드를 처음 봤을 때 저는 그냥 "예쁜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색감이 좋고 배우들이 매력적이라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보면서 이 영화의 미장센이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는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조명 하나, 배경색 하나에도 인물의 감정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장면에서 화면의 색이 눈에 띄게 가라앉는다는 것도 반복해서 보고 나서야 알아챘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뮤지컬 영화가 이렇게 촘촘한 시각적 설계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고전 할리우드 뮤지컬에 대한 오마주(Hommage), 즉 선배 영화인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방식으로 연출을 설계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고, 그 사실을 알고 다시 보니 장면마다 다른 레이어가 보였습니다.
라라랜드가 개봉한 2016년은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가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오른 것이 수십 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아카데미 14개 부문 후보라는 기록도 있지만, 제가 더 인상 깊었던 건 이 영화가 침체해 있던 뮤지컬 장르에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당겼다는 점입니다(출처: 아카데미 오브 모션 픽처 아츠 앤드 사이언스). 그게 단순히 예쁜 화면 덕분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미장센이 관객이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OST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잊혀 가던 재즈(Jazz)의 매력을 다시 느끼게 해 준 영화가 이 작품이었습니다. 세바스찬이 피아노를 치는 장면들을 보면서 재즈 특유의 즉흥성과 감정의 흐름이 이 영화의 전체 분위기와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지 새삼 느꼈습니다.
새드 엔딩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
라라랜드는 새드 엔딩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단정 짓기가 어렵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의 꿈을 이뤘습니다. 미아는 유명 배우가 되었고 세바스찬은 자신의 이름을 건 재즈바를 열었습니다. 다만 함께는 아닙니다. 미아에게는 새 가족이 생겼고, 세바스찬의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두 사람은 말없이 과거를 상상합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미소로 작별을 나눕니다. 저는 이 결말 앞에서 슬프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감정을 느꼈습니다.
인생에는 그런 인연이 분명히 있습니다. 함께하지 못했지만 서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관계. 살아가면서 스쳐가는 인연들 중에 기억조차 못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마음 한편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어느 날 문득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정확히 그 감정을 건드립니다.
예술계 종사자들이 경험하는 심리적 소진(Burnout)은 일반 직군 대비 높은 수준을 보이며, 이는 외적 보상의 불확실성과 내적 동기 사이의 충돌에서 비롯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여기서 심리적 소진이란 오랜 기간 높은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한 결과 의욕과 효능감이 고갈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라라랜드가 꿈을 좇는 사람들에게 유독 깊이 공명하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미아와 세바스찬의 갈등은 예술계 종사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꿈과 현실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갈등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다른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도 그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였고, 두 번째에는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였고, 세 번째부터는 꿈과 사람 사이에서 갈등했던 제 순간들이 겹쳐 보였습니다. 두 번 이상 봐야 두 사람의 인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라라랜드는 새드 엔딩인가요, 해피 엔딩인가요?
A. 새드 엔딩이라는 의견이 많지만, 제 경험상 단순하게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각자의 꿈을 이뤘고 서로를 그 자리까지 이끌어준 관계였습니다. 함께하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서로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해보면 전혀 다른 결말로 읽힙니다.
Q. 라라랜드를 몇 번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나요?
A. 저는 최소 두 번은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느라 놓치는 장면이 많습니다. 두 번째부터는 미장센과 뮤지컬 넘버의 의도가 눈에 들어오고, 두 인물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훨씬 선명하게 보입니다.
Q. 뮤지컬 영화를 평소에 안 좋아하는데 라라랜드도 어색할까요?
A. 저도 뮤지컬 장르를 잘 안 보는 편이었는데, 라라랜드는 달랐습니다. 초반에는 어색함이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뮤지컬 넘버가 이야기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장르 때문에 망설이고 계신다면 일단 30분만 보시는 것을 권합니다. 제 경험상 그 안에 분위기에 적응이 됩니다.
Q. 라라랜드 OST 중에 가장 유명한 곡은 무엇인가요?
A. 'City of Stars'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세바스찬과 미아가 부두에서 함께 부르는 이 곡은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했습니다. 재즈 특유의 서정적인 멜로디 덕분에 영화를 보고 나서도 오래 귓가에 남는 곡입니다.
결론
라라랜드를 한 번만 보셨다면, 한 번 더 보시길 권합니다. 이번에는 미아와 세바스찬이 어떻게 되는지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무엇을 남겼는지에 집중해 보시면 전혀 다른 영화가 보일 것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뮤지컬 장르가 어색하다고 생각했던 저도, 세 번쯤 보고 나서는 이 영화 없이 라라랜드를 설명하는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빠져들었습니다.
꿈과 사랑 사이에서 무언가를 포기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영화는 그 경험을 건드립니다. 정리가 되지 않았던 감정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조용히 자리를 잡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