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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아오야마신지, 봉준호, 일본영화, 야쿠쇼코지, 예술영화, 치유영화

3시간 30분짜리 영화를 집에서 봐도 되겠지 싶어서 몇 년째 미뤄왔습니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유레카'가 바로 그 영화였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반드시 큰 화면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넘겼던 거죠. 이 글은 그 안일함을 뒤늦게 후회하게 된 이유와, 이 영화가 왜 지금 다시 봐야 하는 작품인지를 정리한 기록입니다.
봉준호가 '유레카'를 언급한 이유, 그 맥락부터 짚어야 합니다
솔직히 저도 2000년대 일본 예술영화 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구로사와 기요시를 먼저 떠올렸습니다. 아오야마 신지는 그 이름들 뒤에 살짝 묻혀 있는 감독이었고, 관심은 있어도 막상 손이 잘 안 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감독은 실제로 같은 토양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하스미 시게히코라는 영화 평론가가 있는데, 여기서 하스미 시게히코란 일본 영화 이론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인물로 도쿄대학 총장까지 역임한 비평계의 레전드를 말합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는 모두 그 하스미의 영향 아래서 영화를 배웠고, 두 감독과 하스미가 함께 영화에 대한 대화를 담은 책 '영화 장화'를 낸 적도 있습니다. 국내 출간 이후 현재는 절판 상태인데, 저도 뒤늦게 이 책의 존재를 알고 한참 구하러 돌아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봉준호 감독이 구로사와 기요시의 광팬임은 워낙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의 대담에서 "기요시 팬클럽 회장 자리를 놓고 경쟁해 보자"라고 농담했을 정도니까요. 그런 봉 감독이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를 상대적으로 덜 언급해 온 이유도 결국 "기요시 감독님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꽤 솔직하게 들렸습니다. 팬심이 있어도 좋아하는 것들 사이에서 우선순위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봉 감독이 '유레카'를 처음 본 건 2000년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였습니다. 대형 스크린에서 압도당한 그 감각을 25년간 간직해 왔다고 했는데, 그 시기는 마침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막 쓰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합니다. 의식적인 레퍼런스보다 무의식에 남아 있는 이미지가 더 강하게 작동한다는 걸, 봉 감독 스스로도 "무의식 중에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 '유레카' 속 수풀 사이 시체, 물 위를 떠내려오는 신발 한 짝
- '살인의 추억' 후반부 강가의 시체와 크레인 샷 — 크레인 샷이란 카메라를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듯 촬영하는 기법으로, 인물의 고립감이나 상황의 압도적 규모를 표현할 때 씁니다
- 두 영화 모두 사건의 끔찍함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암시하는 방식을 선택
'유레카'에서 두 번째 살인을 알리는 방식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신발 한 짝이 물 위에 떠내려오다 멈추고, 그 아래 물속에 맥주캔이 잠겨 있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소름이 돋았습니다. 누군가 죽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간결하게 전달하는 방식을 그전까지는 본 적이 없었거든요.
서부극의 미장센을 빌려온 일본 영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유레카'가 존 포드의 '수색자'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미장센이라는 개념을 짚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들,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세트, 카메라의 움직임 전체를 가리키는 영화 용어입니다. 쉽게 말해 "카메라 앞에 무엇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연출의 핵심 언어라고 보면 됩니다.
아오야마 신지는 서부극의 미장센을 그대로 가져오면서, 거기에 당대 일본의 상처와 침묵을 채워 넣었습니다. 광활한 풍경이 인물의 내면 상태를 대변하는 방식은 안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이나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맥락이 닿아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영화들은 줄거리보다 화면에 더 집중해서 봐야 제대로 소화됩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려 하면 오히려 놓치는 게 생기거든요.
'유레카'는 2001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에큐메니컬 상을 받았습니다. 수상 소감에서 아오야마 신지 감독은 "이 영화는 계속 살아갈 용기를 찾고 있는 현대인들을 위한 일종의 기도입니다. 저는 그들이 절망의 가장자리에서 부활을 위한 항해를 떠나는 과정을 담고 싶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말을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읽으면 무게감이 달라집니다.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영화 팬들 사이에서 "꼭 봐야 할 일본 영화"로 입소문을 타왔지만, 정식 극장 개봉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이번 리마스터링 버전 재개봉 소식이 반가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강조한 "큰 화면"의 경험을 이제야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셈이니까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치유는 우리가 아는 것과 좀 다릅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치유 서사는 한바탕 울고 나면 뭔가 해결되는 방식입니다. 한강 둔치에서 맥주 한잔이면 화해가 되고, 통화 한 번으로 오해가 풀리는 식이죠. 제 경험상 이건 현실과 꽤 다릅니다. 실제로 상처 입은 사람과 관계를 회복하는 건 그렇게 빠르지 않으니까요.
트라우마라는 개념을 여기서 짚어야 합니다. 트라우마란 심각한 충격적 사건으로 인해 심리적 기능이 손상된 상태를 의미하며, 회복에는 장기적인 시간과 반복적인 안전감의 축적이 필요합니다(출처: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유레카'는 바로 그 "장기적인 시간"을 3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 안에 고스란히 구현합니다. 영화가 길다는 게 아니라, 그 더딤 자체가 치유의 본질이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야쿠쇼 코지가 연기하는 마코토가 처음 아이들의 집에 도착해서 하는 일이 청소와 밥 차리기입니다. 거창한 위로의 말이 없습니다. 이후에도 치유는 누군가에게 포크레인 조작법을 알려주거나, 운전을 가르쳐주거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건네는 식으로 이어집니다. 저는 이 조용한 전달 방식을 보면서 실제로 제가 힘들었을 때 곁에 있어준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들도 딱히 뭔가를 해결해 준 게 아니었거든요. 그냥 옆에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이 영화 비평에서 자주 쓰이는데, 카타르시스란 감정의 해소와 정화를 뜻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으로, 관객이 극을 통해 감정적 긴장을 풀어내는 경험을 의미합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유레카'는 폭발적인 카타르시스를 주는 영화가 아닙니다. 대신 마지막 장면에서 흑백으로 전환된 화면과 자유롭게 날아가는 카메라 트래킹이 겹치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해방감이 서서히 밀려옵니다. 절제돼 있던 카메라가 마침내 해방되는 그 순간, 영화 전체가 한꺼번에 숨을 내쉬는 느낌입니다.
마코토가 나오키에게 마지막으로 건네는 말이 이겁니다. "꼭 살아야 한다고 말하진 않겠다. 그래도 부탁한다. 죽지는 말아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 절묘한 위치, 살라고 강요할 수 없는 상황을 알면서도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 이 영화가 오래 기억되는 이유가 이 한 문장 안에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유레카 러닝타임이 3시간 30분인데 집에서 봐도 괜찮을까요?
A. 볼 수는 있지만 경험의 밀도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봉준호 감독이 "반드시 큰 화면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광활한 풍경의 미장센이 핵심인 작품이라, 작은 화면에서는 그 압도감이 절반도 전달되지 않습니다. 리마스터링 재개봉 기회를 놓치지 않는 걸 권합니다.
Q. 아오야마 신지 감독 다른 작품도 봐야 하나요,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A. '유레카'가 대표작이자 진입점으로 가장 좋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 하스미 시게히코와의 연결 고리를 알고 보면 감독의 영화적 언어가 어디서 왔는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유레카'를 먼저 보고 나서 두 감독의 작품들을 함께 비교해가며 보는 방식을 권합니다.
Q. '유레카'와 '살인의 추억' 사이에 실제로 연관이 있는 건가요?
A. 봉준호 감독 본인이 "무의식중에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유레카'를 처음 본 시점이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쓰던 때와 겹치고, 두 영화 모두 사건의 충격보다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닮아 있습니다. 명시적 레퍼런스보다 무의식적 영향에 가깝습니다.
Q. 예술영화에 익숙하지 않은데 '유레카'를 버틸 수 있을까요?
A. 솔직히 말하면 초반 40분이 가장 힘든 구간입니다. 극적인 사건이 없고 카메라도 느립니다. 그런데 그 더딤에 적응하고 나면 오히려 화면에서 눈을 떼기 어려워집니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따라가려 하지 말고, 그냥 화면을 바라보듯 보는 것이 이 영화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결론
'유레카'는 보고 나서 입 다물고 조용히 앉아 있고 싶어지는 영화입니다. 그 감각 자체가 이 영화가 건네는 진짜 선물입니다. 제가 몇 년간 미뤄온 걸 후회하는 이유도 그겁니다. 큰 화면에서 봐야 한다는 말을 알면서도 "집에서 봐도 되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시간이 아깝습니다.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극장 개봉 기회가 생겼다면 이번이 거의 유일한 타이밍일 수 있습니다. 대형 상업영화와는 전혀 다른 호흡과 감성을 지닌 작품인 만큼, 조용히 오래 남는 영화를 찾는 분들이라면 망설이지 마십시오. 저처럼 나중에 후회하기 전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