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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민트, 류승완, 영화리뷰, 조인성, 첩보영화, 넷플릭스, 한국영화

잘 만든 영화가 꼭 좋은 영화는 아니라는 걸, 저는 '휴민트'를 보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넷플릭스 글로벌 1위까지 찍은 영화가 왜 극장에선 200만 명에 그쳤을까요. 제작비 230억 원이 투입된 류승완 감독의 신작, 직접 보고 나서 느낀 건 '아, 이건 류승완 영화가 아니다'였습니다.
장르 배신: 착한 스파이는 왜 영화를 망치는가
첩보 영화를 볼 때마다 저는 주인공이 얼마나 더럽게 구는지를 유심히 봅니다. 스파이물의 핵심은 주인공도 시스템의 부품이라는 데 있거든요. 그런데 '휴민트'의 조 과장(조인성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깨끗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휴민트(HUMINT)'란 Human Intelligence의 줄임말로, 쉽게 말해 사람을 자산으로 삼아 정보를 빼내는 행위를 뜻합니다. 여기서 HUMINT란 단순한 정보 수집이 아니라, 인간을 도구로 활용하고 필요에 따라 소모하는 냉혹한 정보전의 방식입니다. 그 전제 자체가 도덕적으로 불편할 수밖에 없는 구조죠.
제가 '베를린'을 좋아했던 이유도 바로 그 불편함 때문이었습니다. 스파이는 영웅이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소모되는 외로운 톱니바퀴였습니다. 그 마찰이 긴장감을 만들었고요. 하지만 '휴민트'의 조 과장은 정보원 최선화를 처음부터 진심으로 대하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겁니다. 도덕적 오염(moral contaminati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도덕적 오염이란 선한 목적을 위해 악한 수단을 쓰는 과정에서 주인공 스스로가 오염되어 가는 심리적 갈등을 말합니다. 첩보 장르의 긴장감은 바로 이 오염과의 싸움에서 나오는데, '휴민트'는 그 싸움 자체를 없애버렸습니다.
모든 도덕적 책임은 빌런인 북한 총영사 황치성에게 몰아졌습니다. 조 과장은 처음부터 좋은 사람이고, 최선화는 순수한 피해자입니다. 영화는 편안해졌지만, 동시에 공허해졌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의 영화는 볼 때는 무난한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휴민트'가 딱 그랬습니다.
- HUMINT(인적 정보): 인간을 정보 자산으로 활용하는 냉혹한 첩보 방식
- 도덕적 오염: 선한 목적을 위해 악한 수단을 쓰며 주인공이 흔들리는 내적 갈등
- 조 과장 캐릭터: 장르적 전제를 스스로 해체한 '흠 없는' 주인공
- 결과: 제목과 내용이 따로 노는, 갈등 없는 첩보 영화
남북 묘사와 류승완의 분노: 무엇이 사라졌는가
'공동경비구역 JSA'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엔딩에서 꽤 오래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남북 병사들의 우정이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 우정이 구조 때문에 절대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도 그랬습니다. 남북 외교관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면서도, 죽지 않으려고 손을 잡았습니다. 쉽게 손잡지 않았기에 그 장면이 감동적이었던 거죠.
'휴민트'에서 조 과장과 북한 보위성 요원 박건의 협력은 너무 빠르고 너무 매끄럽습니다. 박건이라는 캐릭터 설정에서 제가 가장 걸렸던 부분도 바로 그겁니다. 북한 국가보위성(State Security Department)은 체제 유지를 위해 자국민을 감시하고 처형하는 기관입니다. 여기서 국가보위성이란 단순한 정보기관이 아니라, 북한 내부의 정치범 수용소 운영과 반체제 인사 숙청을 전담하는 공포 통치의 핵심 기구입니다(출처: Amnesty International). 그런 기관의 요원이 사랑 하나로 체제를 가볍게 이탈한다는 설정은 제 눈에는 너무 순진하게 읽혔습니다.
탈북이나 체제 이탈은 엄청난 심리적 무게를 동반합니다. 가족이 처형될 수도 있고, 수십 년간 내면화한 이념과 싸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제 경우엔 이 무게를 제대로 다룬 작품들, 예를 들어 탈북 증언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들을 보면서 그 심리적 밀도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는데, '휴민트'의 박건은 그 무게를 전혀 짊어지지 않았습니다(출처: Human Rights Watch). 박건이 시스템 안에서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는 영화에서 지워지고, 그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인물로만 남습니다. 이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과 정반대 방향입니다. 악의 평범성이란 평범한 사람들이 시스템 안에서 아무런 비판 없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통찰인데, '휴민트'는 그 통찰을 정확히 역행해 시스템 속 인간의 책임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류승완 감독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부당거래'는 권력 부패에, '베테랑'은 갑질과 계급에 선명하게 분노했습니다. 그 분노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에너지가 류승완 영화의 온도였습니다. 제가 직접 극장에서 '베테랑'을 봤을 때, 황정민이 유아인을 잡으러 달려가는 장면에서 옆자리 관객이 박수를 쳤던 기억이 납니다. '휴민트'에는 그 온도가 없었습니다. 인신매매, 북한 체제, 정보기관의 냉혹함이라는 세 개의 분노 대상이 동시에 등장하지만, 어느 하나도 제대로 폭발하지 못하고 모두 미지근하게 식었습니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마음껏 해본 느낌'이라고 말한 것은 솔직히 슬프게 들렸습니다. 감독의 만족감과 관객이 원하는 것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이번 영화가 남긴 가장 쓸쓸한 지점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휴민트 넷플릭스 1위인데 극장 흥행은 왜 실패했나요?
A. 경쟁작 '왕과 사는 남자'가 설 연휴에 500만 관객을 돌파한 반면, '휴민트'는 약 200만 명에 그쳤습니다. 넷플릭스에서의 역주행은 오히려 굳이 극장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저는 봅니다. 극장과 스트리밍의 소비 방식이 달라진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례입니다.
Q. 조인성 조 과장 캐릭터가 왜 문제라고 하나요?
A. 첩보 장르에서 주인공은 시스템 안에서 도덕적으로 오염되어가는 과정이 긴장감의 핵심입니다. 조 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흠 없이 선한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에, 영화가 스스로 내세운 HUMINT라는 냉혹한 전제를 해체해버리는 모순이 생깁니다. 갈등이 사라지면 영화는 밋밋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Q. 박건 캐릭터가 북한 보위성 요원으로서 설득력이 없다는 이유가 뭔가요?
A. 북한 국가보위성은 체제 유지를 위해 감시와 처형을 담당하는 기관입니다. 그 요원이 사랑 하나로 체제를 가볍게 이탈한다는 설정은 실제 탈북의 심리적 무게와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박건이 그 시스템 안에서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가 지워진 채 숭고한 인물로만 그려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Q. 류승완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A. '부당거래'와 '베테랑'에는 권력 부패와 계급에 대한 선명하고 뜨거운 분노가 있었습니다. '휴민트'는 인신매매, 북한 체제, 정보 기관의 냉혹함이라는 여러 주제를 동시에 건드리다 보니 어느 하나도 제대로 폭발하지 못했습니다. 완성도는 높아졌지만, 그 대가로 영화의 온도가 사라졌다는 게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결론
좋은 영화는 극장 문을 나서도 영화 속에 머물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의 풍경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머릿속이 영화로 꽉 차 있는 경험, 저는 그걸 진짜 영화라고 부릅니다. '휴민트'는 그 경험을 주지 못했습니다. 사실 혹평이라는 것도 결국 기대치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영화라면 '생각보다 괜찮네'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휴민트는 소재만 봐도 기대할 만한 요소가 많았습니다. 첩보라는 장르도 그렇고, 남북이라는 소재도 그렇고, 배우들의 조합이나 영화가 가진 분위기도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영화를 보기 전에는 상당히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만큼의 재미와 긴장감을 얻지 못하다 보니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좋은 소재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은 역시 다른 문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휴민트, 혹평의 이유는 하나로 정리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좋은 소재와 기대할 만한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던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휴민트는 소재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도 컸던 영화였습니다. 물론 영화는 사람마다 느끼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제 생각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휴민트'는 분명 잘 만든 영화입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보고 나서 느낀 건, 류승완 감독이 이 영화에서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한 것과 관객이 원하는 것을 준 것은 달랐다는 점입니다. 장르적 전제를 스스로 해체한 주인공, 구조적 비극 없이 개인의 감정으로 해소된 남북 관계, 그리고 여러 주제에 분노하다 어느 것도 터뜨리지 못한 연출. 이 세 가지 아쉬움이 겹쳐 영화는 매끄럽지만 차갑게 남았습니다. 평점은 10점 만점에 5점입니다. 언젠가 다시 분노하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