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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행 (동심, 힐링 영화, 야생 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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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1996년 작이라는 말에 별 기대 없이 틀었다가, 끄지 못하고 끝까지 봤습니다. 기러기 떼와 경비행기가 함께 하늘을 가르는 장면 하나가 머릿속에서 며칠째 떠나질 않더군요. 삭막한 일상에서 이런 감각이 남아 있다는 게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동심을 잃은 어른에게 건네는 영화 한 편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이 영화가 아이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주인공은 열세 살 소녀 에이미이고, 이야기 자체는 단순합니다. 공사로 보금자리를 잃은 캐나다 기러기 알들을 에이미가 직접 부화시키고, 경비행기를 타고 기러기들과 함께 월동지인 미국 버지니아까지 날아가는 여정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이야기가 묘하게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여기서 '각인(imprinting)'이라는 개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각인이란 새끼 조류가 태어난 직후 처음 본 움직이는 대상을 어미로 인식하고 따르게 되는 행동 발달 과정을 의미합니다. 에이미가 부화시킨 기러기들이 에이미만 졸졸 따라다니고, 에이미의 경비행기 뒤를 V자 편대로 날아가는 것도 바로 이 각인 때문입니다. 조류 행동학에서는 이를 '각인 효과(filial imprinting)'라고 부르며, 한 번 형성되면 되돌리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에서 경찰이 에이미에게 경고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야생 동물 보호 관점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단순한 훈계가 아닙니다. 인간 손에서 자란 야생 조류는 자연으로의 귀환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실제로 야생 조류의 재자연화(rewilding), 즉 인간에게 길들여진 야생 동물을 자연 생태계에 다시 적응시키는 과정은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영화 속 아버지 토머스가 경비행기를 직접 제작해 기러기들에게 이동 경로를 훈련시키는 장면은 바로 이 재자연화 과정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동물과 함께하는 영화는 결국 인간 중심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에이미는 기러기들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기러기들이 스스로 날 수 있도록, 스스로 이동할 수 있도록 끝까지 밀어주고 결국 손을 놓습니다. 그 과정이 어설프지 않고 꽤 정직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상처는 사랑을 받을 때만이 아니라, 사랑을 줄 때도 치유된다
- 야생의 생명을 돌보는 것은 결국 놓아주는 과정이다
- 어른이 잃어버린 동심은 아이의 순수한 행동 앞에서 되살아난다
30년 전 영화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
저도 처음엔 1996년작이라는 점에서 영상미가 많이 떨어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기러기 떼와 경비행기가 함께 비행하는 시퀀스는 CGI(컴퓨터 생성 이미지), 즉 컴퓨터로 만들어낸 가상 영상이 아닌 실제 항공 촬영으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요즘처럼 클릭 한 번에 디지털로 구현되는 장면들과는 결이 다릅니다. 화면 안에 실제 하늘, 실제 새, 실제 사람이 있다는 감각이 있었고, 그게 주는 무게감이 달랐습니다.
이 영화는 화가이자 발명가인 빌 슈만이 캐나다에서 미국 버지니아까지 실제로 기러기를 이주시킨 사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철새 이동 경로(flyway)'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철새 이동 경로란 철새들이 계절에 따라 번식지와 월동지 사이를 이동할 때 사용하는 일정한 하늘길을 의미하며, 북미 대륙에는 크게 4개의 주요 flyway가 존재합니다. 영화 속 기러기들이 반드시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해야 하는 이유도 이 철새 이동 본능 때문입니다.
감독 니콜라스 배니어는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일관되게 다뤄온 감독입니다. 이 영화 외에도 2004년 다큐멘터리 "마지막 사냥꾼"이나 2013년 "벨과 세바스찬", 최근작 "조랑말 폴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는 한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묻는 방식이 다를 뿐, 질문 자체는 늘 같습니다.
"이런 영화는 결국 어린이용 감동 코드에 머문다"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에이미가 3살 때 아버지와 헤어지고, 뉴질랜드에서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고, 10년 만에 낯선 캐나다로 건너온 정황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 무게가 기러기들과의 관계를 통해 서서히 풀려나가는 방식은, 제가 직접 봤을 때 아동 영화의 문법이 아니라 진짜 인간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생물 다양성 보전과 철새 보호의 중요성은 국제 자연보전연맹(IUCN)이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의제이기도 합니다. 기러기를 포함한 철새 개체군은 서식지 파괴와 기후 변화로 꾸준히 위협받고 있으며, 이 영화가 개봉한 1996년 이후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에이미가 공사 현장에서 알을 가져오는 첫 장면이 단순한 설정처럼 보여도, 그 배경에는 현실적인 맥락이 있습니다.
총 평
'아름다운 여행'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습니다. 화려한 자극 없이 잔잔하게 감동을 전달하는 영화를 점점 찾기 어려워진 지금, 이 영화가 오히려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직접 보고 느낀 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하늘을 나는 기러기 떼의 잔상이 꽤 오래 남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 상처가 치유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누군가를 돌보는 것 자체가 치유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억지스럽지 않게 전달되는 영화, 요즘 그런 영화를 찾기 쉽지 않습니다. 자녀와 함께 보면 더 좋을 것 같고, 좀 더 선한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싶은 분이라면 한 번쯤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