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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로이 (원작 차이, 신화 각색, 촬영 비화)
솔직히 저도 처음 '트로이'를 봤을 때는 그저 브래드 피트의 액션 영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원작 신화를 찾아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얼마나 과감하게 각색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신들의 개입을 완전히 지워버린 감독의 선택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덕분에 인간 영웅들의 드라마가 더 부각된 것도 사실입니다.
원작 일리아스와 영화의 결정적 차이점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사실상 뼈대만 빌려온 수준입니다. 여기서 '서사시(epic poetry)'란 영웅의 위대한 행적을 노래하는 장편 서술시를 의미하는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런 작품들이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시간입니다. 원작에서 트로이 전쟁 준비부터 종결까지는 무려 20년이 걸렸지만, 영화는 이를 단 몇 달로 압축했습니다. 저도 처음엔 이 부분이 이해가 안 됐는데,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물 관계도 완전히 재편되었습니다. 페트로클로스는 원작에서 아킬레스의 연상 친구였지만, 영화에서는 젊은 사촌동생으로 나옵니다. 브리세이스 역시 원작에서는 아킬레스가 다른 도시를 약탈하며 남편을 죽이고 데려온 유부녀 전리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를 트로이 왕가의 혈통이자 신전을 지키는 사제로 설정해, 아킬레스와의 로맨스를 정당화했습니다.
아킬레스의 출생 배경도 다릅니다. 원작에서 그는 반신반인, 즉 여신 테티스와 인간 펠레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입니다. 여기서 '반신반인'이란 신의 피와 인간의 피가 섞인 존재를 뜻하며,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런 영웅들이 초인적 능력을 갖는다고 믿었습니다.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이 전쟁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여장을 시켜 왕궁에 숨겼지만, 오디세우스가 무기를 섞어둔 보석 선물로 정체를 들통내 결국 참전시켰습니다. 반면 영화에서는 테티스가 오히려 아들에게 트로이행을 부추기는 모습으로 나옵니다(출처: 그리스로마신화사전).
죽음의 시점도 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원작에서 아킬레스는 트로이 목마 작전 이전, 헥토르가 죽은 뒤 파리스 뒤에 숨어있던 아폴론 신이 쏜 화살에 발뒤꿈치를 맞고 죽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트로이 목마 안에 숨어 성에 입성한 뒤, 브리세이스를 찾다가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사망합니다.
신을 지운 영화, 그리고 촬영 중 벌어진 기이한 사건들
저는 이 영화의 가장 과감한 선택이 신들의 완전한 삭제라고 생각합니다. 원작에서는 제우스, 아폴론,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등 수많은 신들이 전투 곳곳에 개입합니다. 프리아모스 왕은 헤르메스 신의 안내로 헥토르의 시신을 찾아오고,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메넬라오스와의 결투에서 위기를 모면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 모든 신적 개입을 제거했습니다. 아킬레스가 아폴론의 황금 동상 목을 베어버리며 "어쩌라고"식 도발을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프리아모스 왕국의 사제들은 신을 맹신하다 멸망하는 어리석은 자들로 묘사되고, 아킬레스와 헥토르는 거의 무신론자처럼 등장하며 신을 부정하는 대사를 쏟아냅니다.
이런 선택에 대해 찬반이 갈리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큽니다. 신화의 매력은 인간과 신의 얽힘에서 나오는데, 그걸 완전히 걷어내니 '트로이'라는 제목이 무색해진 느낌입니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이 덕분에 인간 영웅들의 선택과 책임이 더 부각되었다고 봅니다.
흥미로운 건 촬영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제작진은 실제 트로이 유적지가 있는 터키에서 촬영을 요청받았지만 멕시코 해안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멕시코 촬영 중 거대한 트로이 성 세트장이 허리케인에 무너져 촬영이 수개월 중단되었고, 브래드 피트는 아킬레스 역할을 하다가 실제로 아킬레스건을 다쳐 또다시 촬영이 멈췄습니다.
여기서 '아킬레스건(Achilles tendon)'이란 발뒤꿈치와 종아리 근육을 연결하는 힘줄을 뜻하는데, 이 용어 자체가 아킬레스 신화에서 유래했습니다. 아킬레스의 어머니 테티스가 아들을 불사신으로 만들려고 스틱스 강에 담갔는데, 발뒤꿈치를 잡고 담가 그 부분만 강물이 닿지 않아 약점으로 남았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습니다(출처: 옥스퍼드 영어사전). 오늘날 '아킬레스건'은 어떤 사람의 치명적 약점이나 취약점을 상징하는 말로 쓰입니다.
촬영 종료 후 제작진은 터키 정부에 영화에 사용된 실제 크기의 트로이 목마를 기증했고, 이는 현재까지 트로이 유적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실제로 터키 여행 가서 봤을 때 생각보다 훨씬 웅장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트로이 목마(Trojan Horse)'라는 용어도 오늘날까지 살아있습니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속에 위험한 것이 숨어있다는 뜻으로 전 세계적으로 쓰이며, 특히 컴퓨터 보안 분야에서는 악성 코드를 숨긴 프로그램을 '트로이 목마 바이러스'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악성 코드(malware)'란 사용자 몰래 시스템에 침투해 정보를 빼내거나 시스템을 파괴하는 프로그램을 의미합니다.
주요 캐릭터와 배우들의 연기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 브래드 피트 (아킬레스): 육체적 완성도는 최고였지만 감정선은 호불호가 갈렸습니다
- 에릭 바나 (헥토르): 가족을 지키려는 비극적 영웅상을 완벽히 구현했습니다
- 피터 오툴 (프리아모스 왕): 노장 배우의 카리스마로 영화를 빛냈습니다
결국 영화 '트로이'는 원작의 방대한 분량을 2시간 반에 담으려다 보니 많은 걸 포기해야 했습니다. 3부작으로 만들었다면 신들의 개입, 20년에 걸친 전쟁, 복잡한 인물 관계를 모두 담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신을 지우고 인간 드라마에 집중한 선택 덕분에, 오히려 2000년대 관객들에게 더 와닿는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원작 신화를 알고 보면 아쉽지만, 모르고 보면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트로이란 나라는 실제 역사에 존재했으며, 터키에 유적지가 있습니다. 영화는 터키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해안에서 촬영하였고, 제작진은 촬영 종료 후 실제 영화에 사용된 트로이 목마를 터키에 기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