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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로이, 일리아스, 아킬레스, 트로이 전쟁, 그리스 신화, 브래드 피트, 헥토르

트로이 전쟁을 다룬 원작 서사시 '일리아스'에서는 신들이 전쟁의 향방을 직접 바꿉니다. 그런데 2004년 영화 '트로이'는 그 신들을 전부 지워버렸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꽤 오래 멍했습니다. 뼈대만 빌려온 각색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과감한 선택이었거든요.
원작과 영화의 결정적 차이점, 생각보다 훨씬 컸습니다
혹시 영화를 보면서 "트로이 전쟁이 이렇게 짧았나?" 싶은 느낌이 드셨다면, 그게 착각이 아닙니다. 원작 서사시에서 트로이 전쟁은 준비부터 종결까지 무려 20년이 걸립니다. 영화는 그걸 몇 달짜리 이야기로 압축했습니다. 제가 원작을 찾아보고 나서야 이 부분이 얼마나 대담한 생략인지 실감했습니다.
인물 관계도 완전히 재편되었습니다. 원작에서 페트로클로스는 아킬레스의 연상 친구였지만, 영화에서는 젊은 사촌동생으로 나옵니다. 브리세이스 역시 원작에서는 아킬레스가 다른 도시를 약탈하며 남편을 죽이고 데려온 전리품이었습니다. 그 브리세이스를 영화는 트로이 왕가의 혈통이자 신전을 지키는 사제로 탈바꿈시켰고, 덕분에 아킬레스와의 로맨스에 명분이 생겼습니다. 제 경험상 원작을 모르고 영화를 봤다면 이 설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졌을 겁니다.
아킬레스의 출생 배경도 다릅니다. 원작에서 그는 반신반인(半神半人), 즉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인간 펠레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여기서 반신반인이란 신의 피와 인간의 피가 섞인 혼혈 영웅을 뜻하며,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런 존재들이 초인적 능력을 갖는다고 여겼습니다. 원작 속 테티스는 아들이 전쟁에 나가지 못하도록 여장을 시켜 왕궁에 숨겼습니다. 영화에서는 정반대로, 테티스가 오히려 아들에게 트로이행을 권유하는 모습으로 나옵니다(출처: 옥스퍼드 영어사전). 같은 어머니인데 정반대의 캐릭터로 그려진 셈입니다.
아킬레스의 죽음이 바뀐 것도 원작을 아는 분들께는 꽤 낯설게 느껴질 부분입니다. 원작에서는 헥토르가 죽은 뒤 아폴론 신의 도움을 받은 파리스의 화살이 아킬레스의 발뒤꿈치를 맞혀 죽음에 이릅니다. 트로이 목마 작전보다 훨씬 이전 일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아킬레스는 트로이 성 안에 들어간 뒤 브리세이스를 찾다가 파리스의 화살에 쓰러집니다.
- 전쟁 기간: 원작 20년 → 영화 수개월로 압축
- 페트로클로스: 원작 연상 친구 → 영화 젊은 사촌동생
- 브리세이스: 원작 전리품 유부녀 → 영화 트로이 왕가 혈통 사제
- 테티스: 원작 참전 반대 → 영화 참전 권유
- 아킬레스의 죽음: 원작 목마 작전 이전 → 영화 목마 작전 이후
신을 지운 선택, 저는 아쉽기도 하고 납득도 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장면이 있습니다. 아킬레스가 아폴론의 황금 동상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장면입니다. 원작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신의 응징이 떨어졌겠지만, 영화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감독의 의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원작 서사시 '일리아스'에서는 제우스, 아폴론,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등의 신들이 전투 곳곳에 직접 개입합니다. 서사시(epic poetry)란 영웅의 위대한 행적을 노래하는 장편 서술 시를 가리키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런 작품들이 구전(口傳)으로 전승되다가 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신화적 세계관이 서사의 뼈대 자체를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프리아모스 왕이 헥토르의 시신을 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헤르메스 신의 안내 덕분이었고,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와의 결투에서 살아남은 것도 아프로디테의 개입 때문이었습니다(출처: Perseus Digital Library, 호메로스 일리아스).
영화는 이 모든 신적 개입을 제거했습니다. 그것도 소극적으로 빠뜨린 게 아니라, 프리아모스 왕국의 사제들을 신을 맹신하다 멸망하는 어리석은 자들로 묘사하고, 아킬레스와 헥토르를 거의 무신론자에 가까운 인물로 그렸습니다. 이 선택에 대해 아쉽다는 평도 있는데, 저도 신화의 매력이 인간과 신의 얽힘에서 나오는 만큼 처음엔 비슷하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봅니다. 신의 손길이 없는 세계에서는 아킬레스의 선택도, 헥토르의 죽음도 온전히 그들 자신의 것이 됩니다. 신이 없으니 영웅들의 책임과 무게가 더 선명해지는 역설이 있습니다.
촬영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은 지금 생각해도 묘하게 느껴집니다. 제작진은 터키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해안을 촬영지로 선택했는데, 멕시코에서 촬영하는 도중 거대한 트로이 성 세트장이 허리케인에 무너져 수개월간 촬영이 중단되었습니다. 거기다 브래드 피트가 아킬레스 역할을 하다 실제로 아킬레스건을 다쳐 또다시 제작이 멈췄습니다. 아킬레스건이란 발뒤꿈치와 종아리 근육을 연결하는 힘줄로, 이 용어 자체가 아킬레스 신화에서 유래했습니다. 어머니 테티스가 아들을 불사신으로 만들려고 스틱스 강에 담그면서 발뒤꿈치를 잡고 있었고, 그 부분만 물이 닿지 않아 치명적 약점으로 남았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표현입니다. 신을 지운 영화를 찍다가 그 신화의 이름이 붙은 부위를 배우가 다쳤다는 사실이 뭔가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아킬레스건, 트로이 목마 — 신화가 오늘의 언어가 된 방식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건 배우들의 연기나 스케일이 아니었습니다. 신화에서 나온 말들이 지금 우리 일상 언어 속에 얼마나 깊이 박혀있는지를 새삼 확인한 경험이었습니다.
'아킬레스건'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치명적 약점"이라는 뜻으로 지금도 씁니다. 스포츠 선수의 부상 기사에도, 기업의 취약점을 분석하는 기사에도 등장합니다. 그 단어의 뿌리가 테티스가 스틱스 강물에 아들을 담글 때 잡았던 발뒤꿈치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3,000년 전 이야기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트로이 목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속에 위험한 것이 숨어있다는 뜻으로 전 세계에서 통용되며, 특히 컴퓨터 보안 분야에서는 악성 코드를 숨긴 프로그램을 '트로이 목마 바이러스'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악성 코드란 사용자 몰래 시스템에 침투해 정보를 빼내거나 시스템을 파괴하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을 의미합니다. 신화 속 목책 말이 IT 보안 용어로 살아남은 셈입니다.
영화 속 캐릭터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인상을 남겼습니다. 에릭 바나가 연기한 헥토르는 제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입니다. 가족을 지키려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나서야 하는 비극적 구조가, 브래드 피트의 아킬레스보다 훨씬 실감 나게 다가왔습니다. 피터 오툴이 연기한 프리아모스 왕은 노장의 무게가 그대로 느껴지는 연기였고,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아킬레스를 찾아가는 장면은 지금도 영화에서 손꼽히는 명장면으로 기억됩니다.
촬영이 끝난 뒤 제작진은 영화에서 실제 사용했던 트로이 목마를 터키 정부에 기증했고, 이는 현재까지 트로이 유적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제가 실제로 터키 트로이 유적지에서 그것을 봤을 때, 생각보다 훨씬 웅장해서 멈춰 서게 됐습니다. 영화 속 소품이라기엔 너무 실물 같았습니다. 트로이는 실제 역사에 존재했던 도시이며, 그 유적은 터키 차나칼레 주에 남아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트로이는 원작 일리아스를 얼마나 충실하게 따랐나요?
A. 뼈대만 빌렸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전쟁 기간, 주요 인물의 관계, 아킬레스의 죽음 시점까지 핵심적인 설정이 대부분 바뀌었습니다. 원작을 알고 보면 거의 다른 이야기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Q. 영화에서 신들을 왜 전부 없앤 건가요?
A. 감독 볼프강 페테르젠은 신적 개입을 제거함으로써 인간 영웅들의 선택과 책임을 더 부각시키려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신화적 세계관보다 인간 드라마에 집중한 선택인데, 이 때문에 원작 팬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찬반이 갈립니다.
Q. 아킬레스건이라는 말이 정말 신화에서 나온 건가요?
A. 그렇습니다. 어머니 테티스가 아킬레스를 스틱스 강에 담글 때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 그 부분만 강물이 닿지 않았다는 신화에서 유래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발뒤꿈치 힘줄을 가리키는 해부학 용어이자, 치명적 약점을 뜻하는 관용 표현으로 쓰입니다.
Q. 트로이 목마가 지금도 터키에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A. 영화 촬영에 실제 사용된 트로이 목마를 제작진이 터키 정부에 기증한 것은 사실이며, 현재 트로이 유적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제가 직접 가서 봤을 때 생각보다 훨씬 크고 실물감이 있어서 놀랐습니다.
Q. 원작에서 헥토르와 아킬레스 중 누가 더 높이 평가받았나요?
A. 시대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킬레스가 최고의 영웅으로 여겨졌지만, 로마 문명 이후로 헥토르의 평가가 점차 높아졌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헥토르가 아홉 위인 중 한 명으로 존경받은 반면, 아킬레스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선이 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결론
영화 '트로이'는 3,000년 된 서사시를 2시간 반짜리 스크린에 욱여넣으려다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신을 지우고, 20년을 몇 달로 압축하고, 인물 관계를 재편했습니다. 그 과정이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저는 그 선택들 덕분에 영웅들의 이야기가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졌다고 생각합니다. 원작을 알고 보면 아쉽고, 모르고 보면 충분히 재밌는 영화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는 장면은 오디세우스가 아킬레스의 장례식을 치러주면서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이름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독백하는 마지막 부분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원작 서사시를 찾아보고, 두 영웅의 이름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원작 일리아스가 궁금해지셨다면 퍼세우스 디지털 도서관에서 원문과 번역본을 찾아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