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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소 고지 (병역거부, 오키나와 전투, 양심적 병역거부)
<핵소 고지, 데스몬드 도스, 멜 깁슨, 앤드류 가필드, 전쟁영화, 오키나와 전투, 명예 훈장>
총 한 번 쏘지 않고도 전쟁 영웅이 될 수 있을까요? 저도 처음에는 그게 가능한 일인지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의심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멜 깁슨 감독의 <핵소 고지>는 2017년 2월 국내 개봉 당시 관람객 평점 9.20, 누적 관객 177,821명을 기록한 139분짜리 전쟁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단순히 전쟁 영화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병역거부와 군사재판, 그 신념은 어디서 왔을까
데스몬드 도스는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Seventh-day Adventist Church) 신자입니다.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며 십계명을 문자 그대로 따르는 기독교 교파로, 한국에서는 삼육대학교를 설립한 종파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 신앙에 따라 데스몬드는 입대는 하되 집총(執銃), 즉 총기를 소지하거나 사용하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웁니다.
문제는 군대가 그 원칙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훈련소에 들어선 첫날부터 글로버 지휘관은 그를 강제로 쫓아내려 했고, 동료 병사들은 따돌림을 넘어 폭행까지 가했습니다. 저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 솔직히 '저 상황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습니다. 구타로 엉망이 된 얼굴, 취소된 결혼식, 그리고 군사재판까지.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 포기했을 겁니다.
군사재판(Court Martial)이란 민간 법원이 아닌 군 내부에서 군인을 상대로 열리는 재판 절차입니다. 데스몬드는 이 자리에서 "다른 이들이 싸우고 죽는 동안 집에 안전하게 앉아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조국을 위해 싸우고 싶지만,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죠. 저는 이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신념을 지키는 것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꼭 충돌할 필요는 없다는 걸 그가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으니까요.
데스몬드의 신념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개념이 바로 양심적 병역거부(Conscientious Objection)입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란 종교적 또는 도덕적 신념에 따라 전투 참여를 거부하되, 비전투 역할로 복무하는 것을 인정받는 제도입니다. 실제로 미국 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권리 인정 역사는 1940년 선택적 복무법(Selective Training and Service Act) 개정을 통해 제도화된 바 있습니다(출처: 미국 의회 도서관).
오키나와 전투, 총 없이 75명을 구하다
태평양 전쟁(Pacific War)의 마지막 대규모 지상전이었던 오키나와 전투는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약 82일간 이어진 전투입니다. 태평양 전쟁이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기점으로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 일대에서 벌인 전쟁을 말합니다. 이 전투에서 미군 사상자만 약 12,000명 이상에 달했습니다(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데스몬드가 투입된 핵소 고지(Hacksaw Ridge)는 오키나와의 마에다 절벽 일대를 가리킵니다. 가파른 절벽 위에 일본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해 놓은 지형으로, 연합군은 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렀습니다. 저는 영화 속 전투 장면을 보면서 제가 실제로 그 절벽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연기와 먼지 속에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포격 소리, 그 한복판에서 부상자를 찾아 헤매는 데스몬드의 모습이 너무 생생해서 잠깐 호흡이 멎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멜 깁슨 감독이 배우 출신답게 전투 장면 연출을 정말 실전에 가깝게 구현했다고 생각합니다.
후퇴 명령이 떨어진 이후에도 데스몬드는 절벽 위에 홀로 남았습니다. 훈련소에서 익힌 매듭법을 이용해 부상자들을 한 명씩 절벽 아래로 내려보내면서 그가 속으로 반복했다는 기도, "한 명만 더(Just one more)"는 이 영화의 핵심을 압축하는 문장입니다. 밤새 그렇게 구해낸 병사가 공식적으로 75명입니다.
데스몬드가 이 공적으로 받은 훈장이 명예 훈장(Medal of Honor)입니다. 명예 훈장이란 미군에서 수여하는 최고 등급의 군사 훈장으로, 적과의 교전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용감한 행동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수여합니다. 집총을 거부한 의무병이 이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이 저는 지금도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듭니다.
데스몬드의 활약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오키나와 전투 핵소 고지에서 단독으로 75명의 부상 병사를 구출
- 집총 거부 원칙을 끝까지 지키며 의무병으로서 임무 완수
- 1945년 10월 해리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명예 훈장(Medal of Honor) 수훈
-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미군 최초로 명예 훈장을 받은 인물로 역사에 기록
총 평
영화 핵소 고지의 핵심은 종교적 신념과 애국심의 조화입니다. 단순히 전쟁의 승패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살육이 정당화되는 공간에서 생명의 가치를 지키려는 한 개인의 고결한 투쟁을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또한 실화가 주는 묵직한 감동이 압권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스몬드 도스의 행적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하며, 실제 인물의 인터뷰가 삽입된 엔딩 크레딧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비폭력주의자 소년에서 비난 받는 겁쟁이 청년으로, 그리고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기까지 차츰 성장해가는 영화 속 앤드류 가필드의 3단 변신과 3단 매력 발산이 영화를 즐기는 또 다른 묘미를 선사하며 뜨거운 호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핵소 고지>는 반전 메시지를 앞세우는 영화가 아닙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그 한복판에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테레사 파머가 연기한 도로시 역시 기억에 남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데스몬드의 청혼을 받아들인 그녀의 용기가, 데스몬드가 살아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만든 또 하나의 힘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다시 봐도 충분히 값어치 있는 작품입니다. 전쟁 영화에 거리감이 있는 분이라도 한 번쯤은 꼭 보시길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