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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성, 나홍진, 영화해석, 외지인, 무명, 일광, 신정론, 한국영화

     

    영화 곡성을 처음 봤을 때 저는 그냥 불쾌하고 찝찝한 공포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고 나서야 이게 단순한 장르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감독 인터뷰와 삭제된 시나리오를 함께 놓고 보면, 이 영화는 초월적 존재들 사이의 영역 다툼을 배경으로 "신은 과연 선한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공성전 구조 — 외지인과 일광은 처음부터 한 팀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같이 본 친구한테 "결국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야?"라고 물었더니, 한참 잠자코 있다가 "모르겠어"라고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는 그냥 답이 없는 영화라고 넘겼는데, 나중에 감독 인터뷰를 찾아보고 나서야 그 혼란이 의도된 설계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나홍진 감독은 이 영화의 구조를 공성전(攻城戰)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공성전이란 성을 공격하는 쪽과 방어하는 쪽이 맞붙는 싸움을 뜻합니다. 곡성이라는 마을 자체를 두고 외지인과 무명이 영역 다툼을 벌이는 구조인 셈입니다. 외지인은 당산나무로 표시된 마을 경계 바깥에 거처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고, 까마귀를 장독대에 넣거나 효진의 방에 짐승을 침투시키는 방식으로 가택신의 힘을 서서히 약화시켜 나갑니다. 여기서 가택신이란 집을 지켜주는 토속 신앙 속 존재로, 외부의 악기(惡氣)를 막아주는 영적 방어막 역할을 합니다.

    일광이 처음부터 외지인의 편이었다는 것은 감독이 직접 밝힌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더 흥미롭게 본 부분은 일광이 단순한 공모자가 아니라 허주(虛主)를 섬기는 무당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허주란 무당이 진짜 신을 불러들이려다 잡귀가 신내림으로 잘못 들어온 경우를 가리키는 무속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악령인 줄 모르고 신으로 모시게 된다는 뜻인데, 이 설정이 들어오는 순간 일광은 그냥 나쁜 사람이 아니라 속아서 섬기는 자로 읽힙니다. 악의가 아니라 오인(誤認)이라는 점이 이 인물을 더 불편하게 만듭니다.

    외지인이 피해자와 접촉해 물품을 가져가는 것에서 시작해, 일광의 굿판이 끝나면 집 안의 모든 사람이 사망하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이 공식이 되풀이되면서 외지인은 점점 강해지고 무명의 방어선은 하나씩 뚫려 나갑니다. 저는 이 반복 구조를 알고 나서 두 번째로 영화를 보는 내내 굿판 장면이 시작될 때마다 이미 끝난 싸움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외지인이 피해자와 접촉, 물품을 수거해 주술 매개체로 삼는다
    • 피해자 가족이 일광을 부르고, 굿판이 끝나면 가족 전원이 사망한다
    • 외지인과 일광이 피해자의 사진을 찍어 영혼을 흡수, 외지인의 힘이 축적된다
    • 이 사이클이 반복될수록 무명의 방어 거점은 줄어든다
    요약: 곡성은 선악 대결이 아닌 공성전 구조이며, 일광은 허주를 섬기는 무당으로 설계된 속아 넘어간 공모자다.

     

    외지인 정체 — 성육신을 뒤집은 존재

    외지인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그냥 수상한 일본인 노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볼 때 동네 사람들한테 쫓기며 바위에 부딪혀 구르는 장면을 다시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죽지 않는 존재가 왜 저렇게 겁을 내는 걸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감독이 외지인 설계에 사용한 핵심 개념은 성육신(成肉身)입니다. 성육신이란 신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세상에 내려온다는 기독교 신학의 개념입니다. 감독은 이 개념을 뒤집어, 귀신이지만 인간의 살과 뼈를 가진 존재로 외지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외지인은 죽지는 않지만 고통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눈물을 흘리고, 몽둥이를 든 사람들 앞에서 도망칩니다. 초월적 능력과 지극히 인간적인 나약함이 한 몸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 설정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외지인을 그냥 전능한 악으로 그렸다면 이야기는 단순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통을 두려워하는 존재로 만드는 순간, 관객은 그를 완전히 혐오하기도 어렵고 완전히 이해하기도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저는 이 모호함이 영화 전체의 불쾌함을 만들어내는 핵심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중반부에 좀비처럼 묘사되는 빙의 장면이 나오는데, 솔직히 제가 봤을 때는 무섭다기보다 조금 어색하고 코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부분만큼은 흐름이 살짝 깨진다는 인상이 있었습니다. 빙의란 어떤 존재가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들어가 그 육체를 사용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무명이 박춘배와 작부에게 빙의해 종구에게 경고를 전하는 장면이 있는데, 수호신이 직접 나타나지 못하고 인간의 몸을 빌려야 한다는 설정 자체가 그녀의 힘이 제한적임을 암시합니다.

    요약: 외지인은 성육신 개념을 역으로 적용한 존재로, 죽지 않지만 고통을 두려워하는 나약함이 영화 전체의 불쾌감을 만드는 핵심이다.

     

    신정론 — 이 영화가 10년째 불편한 진짜 이유

    무명이 선한 존재라고 단정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판단 자체가 감독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명은 분명 외지인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인간의 윤리와는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아직 어린아이인 효진을 덫의 미끼로 사용했고, 그 덫마저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수호신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잃게 한 존재입니다.

    나홍진 감독이 씨네21 인터뷰에서 직접 밝혔듯, 이 영화의 진짜 중심은 "신이여, 당신은 선한 존재입니까. 존재한다면 왜 방관합니까"라는 물음입니다(출처: 씨네21). 이것을 종교학에서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고 부릅니다. 신정론이란 선한 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왜 세상에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신학적 질문입니다. 이 개념을 알고 영화를 보면, 곡성은 공포물이 아니라 철학적 질문서로 읽힙니다.

    종구의 실패를 두고 "무명을 믿었다면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저는 그조차도 감독이 열어둔 함정이라고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적 의미에서 "믿음이 먼저고 이해는 나중"이라는 말이 맞다 해도,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비극이 피해질 수 있었는지는 영화가 끝내 답을 주지 않습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부활한 외지인의 능력이 이미 무명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기다렸다 해도 덫이 성공했을 보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파묘와 비교해서 생각하게 된 건, 두 작품이 한국 무속 신앙과 일본인 악역이라는 공통 에너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파묘는 후반에 국뽕 전개로 이상하게 마무리됐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곡성은 그런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엔딩에서 일광이 아침에 사진을 찍어가는 장면, 그 사진들이 모두 그 둘이 벌인 짓이라는 걸 보여주는 순간, "그럼 지금까지 내가 본 게 다 뭐였지?"라는 허탈함이 밀려왔습니다. 저는 그 허탈감이 감독이 정확하게 설계한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약: 곡성은 신정론을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이며, 종구의 실패와 무명의 무력함은 "선한 신이 존재해도 비극은 막을 수 없는가"라는 질문의 실체다.

     

    자주 묻는 질문

    Q. 곡성에서 외지인은 결국 악마인가요, 아닌가요?

    A. 외지인을 단순히 악마로 단정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잘라 말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감독은 성육신 개념을 뒤집어 고통을 두려워하는 나약함을 외지인에게 부여했습니다. 전능한 악이 아니라 인간적 약점을 가진 초월적 존재로 설계했기 때문에, "악마냐 아니냐"라는 이분법 자체가 감독이 지워버리려 한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Q. 무명은 선한 존재인가요?

    A. 무명이 수호신이라는 해석이 많은데, 저는 그 판단이 감독의 함정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명은 어린 효진을 덫의 미끼로 사용했고, 그 덫마저 실패했습니다. 수호신이 직접 나타나지 못하고 빙의로만 개입할 수 있다는 설정 자체가 그녀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Q. 일광은 왜 외지인을 도운 건가요?

    A. 일광이 처음부터 외지인의 공모자였다는 것은 감독이 직접 밝힌 사실입니다. 다만 일광의 설정에 허주 개념이 적용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허주란 진짜 신을 모시려다 잡귀가 잘못 들어온 경우를 가리키는 무속 개념으로, 일광이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오인으로 인해 잘못된 신을 섬기게 된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Q. 종구가 무명을 믿었다면 결말이 달라졌을까요?

    A. 믿음이 달라진 결말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저는 그 해석조차 감독이 열어둔 함정이라고 봅니다. 부활한 외지인의 능력이 이미 무명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기다렸다 해도 결과가 달랐을 보장이 없습니다. 영화는 그 질문에 끝내 답을 주지 않으며, 그 침묵 자체가 신정론에 대한 감독의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곡성을 다시 보고 나서 제 생각이 바뀐 게 하나 있습니다. 처음에는 종구가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이라고 봤는데, 지금은 그가 틀린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쪽으로 읽힙니다. 딸을 살리려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으로 움직였을 뿐이고, 그 결말이 처참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진짜 비극입니다.

    스릴러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정말 주옥같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보고 나서 찝찝하다는 평도 많고, 징그럽고 무서운 걸 싫어하는 분들에게는 권하기 어렵습니다. 곡성을 다시 볼 생각이 있다면, 외지인이나 무명이 아니라 종구의 눈만 따라가 보시길 권합니다. 그가 매 순간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었는지를 좇다 보면, 감독이 보내는 질문이 조금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XN3qBEU-YD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