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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 실화 (광주 5.18, 위르겐 힌츠페터, 김사복)
여러분은 영화 한 편을 보고 며칠씩 멍하게 있었던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고 나서 한동안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다룬 이 영화는 단순한 실화 영화가 아니라,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역사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택시운전사 김만섭(실제 인물 김사복)과 독일 기자 피터(실제 위르겐 힌츠페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날 광주에서는 정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평범한 택시운전사는 왜 광주로 향했을까
송강호가 연기한 택시운전사 김만섭은 처음부터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딸 하나 먹여 살리기 위해 오늘도 악착같이 핸들을 잡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죠. 최루탄이 터지면 익숙한 솜씨로 코밑에 럭키 치약을 바르고,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공부나 열심히 해"라며 꼰대스러운 잔소리를 늘어놓는 인물입니다.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서도 그의 첫 걱정은 "이러다 손님도 또 끊기는 거 아니야?"였습니다. 자기가 먹고사는 일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속물적인 사람이었죠. 하지만 저는 이 설정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공감이 갔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 않습니까? 가족 먹여 살리기도 벅찬데 세상 돌아가는 일까지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만섭이 광주로 향하게 된 건 순전히 돈 때문이었습니다. 거액 10만 원에 혹해서 독일 기자 피터를 태우고 광주까지 가겠다고 나선 것이죠. 1980년 당시 10만 원은 정말 큰돈이었습니다. 딸에게 새 운동화 하나 사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그를 광주로 이끌었습니다.
여기서 '계엄령'이란 국가 비상사태 시 군이 행정·사법권을 장악하는 초헌법적 조치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민간인의 자유와 권리가 제한되고 군대가 치안을 담당하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광주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나
처음 광주에 도착했을 때, 만섭의 눈에 비친 광주는 서울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밝은 햇살 아래 평화로워 보이는 도시였죠. 하지만 곧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마구 터지는 최루탄으로 화면은 뿌옇게 흐려졌고, 광주 MBC가 불타오르던 밤이 되자 도시 전체가 붉게 타오르는 지옥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1984년쯤 처음 접했던 광주 비디오 테이프가 떠올랐습니다. 당시에는 VHS 테이프 시대였는데, 복사를 거듭한 탓에 화면이 너무 흐릿해서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죠. 그런데도 그 영상이 주는 공포는 생생했습니다. 다른 공포 영화는 극장을 나오면 현실로 돌아오지만, 광주 비디오는 성당을 나와도 더 무서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영화 속 만섭도 그날 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직접 목격합니다.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을 쏘고, 곤봉으로 마구 때리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본 것이죠. 본인 또한 끔찍한 폭력에 희생당할 뻔했습니다. 여기서 '계엄군'이란 계엄령 하에서 치안과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투입된 군병력을 의미합니다. 1980년 5월 광주에는 공수부대를 포함한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었고, 이들의 과잉 진압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낳았습니다.
만섭은 도망치듯 광주를 빠져나왔지만, 평소 즐겨 듣던 유행가 가사조차 더 이상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날 본 광경이 악몽처럼 그를 괴롭혔죠. 송강호 배우의 연기가 빛나는 갈림길 장면에서, 마침내 울음이 터진 그는 딸의 이름을 부르며 핸들을 돌려 다시 광주로 향합니다.
한 사람의 용기가 역사를 바꿨다
유턴하는 순간부터 만섭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영화도 이를 여러 장면으로 강조하는데요. 딸에게 선물할 신발을 사 들고 집으로 향하던 만섭은, 광주로 돌아와 억울하게 희생당한 대학생 재식의 발에 그 신발을 신겨줍니다. 택시를 자기 몸같이 아끼던 만섭은 광주 시민들을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택시를 총알받이로 사용했죠.
여기서 저는 광주 시민들의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희망을 봤습니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도 서로를 위해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주고, 낯선 외국인 기자를 환대하며 "우리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달라"고 간청하는 모습 말입니다. 제가 가장 울컥했던 장면이 바로 도청 광장으로 가는 행렬이었습니다. 카메라를 든 외국인을 본 시민들이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느꼈을 고립감을 상상해보세요. 도청 앞에서 수백 명이 죽고 다쳤는데, 광주 MBC에서는 계속 쇼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외부와 연락도 끊긴 상황에서 광주 시민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그래서 이방인이라도 반가웠던 겁니다. 누구든 밖에서 와서 우리가 당하는 일을 세상에 알려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거죠.
실제로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촬영한 영상은 독일 공영방송 ARD를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되었습니다. 국내 언론이 침묵하고 있을 때, 한 외국인 기자의 용기가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알린 것입니다.
광주의 기억은 어떻게 전국으로 퍼져나갔나
광주 항쟁이 진압되고 관련자들이 감옥에 가고 군대로 끌려간 후, 몇 년간 침묵이 강요됐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도 진실은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이 만화 동호회라는 이름으로 몰래 광주 비디오를 상영했고, 이 영상은 VHS 테이프로 복사되고 또 복사되면서 전국으로 번져나갔죠.
저는 69년생으로 5.18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그때 뉴스에서는 "광주에서 폭도가 일어났다"고만 보도했습니다. 전주에 살던 저는 KBS 방송국 앞에 장갑차가 와 있는 걸 보고 신기해하며 구경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몰랐죠. 그게 얼마나 끔찍한 순간이었는지. 나중에 진실을 알고 나서야 그날의 장면들이 섬뜩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다른 지역 청년 학생들은 엄청난 죄책감과 부채 의식을 느꼈습니다. 광주가 혼자 싸우다 피를 흘렸다는 사실이 그들을 괴롭혔죠. 그래서 광주 비디오를 현실 밖으로 끌어내 전국적인 항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1987년 6월 항쟁입니다.
1987년 6월 10일,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을 때 광주는 처음에 조심스러웠습니다. '또 혼자 싸우다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트라우마가 있었던 거죠. 하지만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이번에는 고립당하지 않는다, 모두가 함께 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때 비로소 광주가 다시 불타올랐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결국 1987년 민주화의 밑거름이 되었고,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비록 야권 후보 분열로 정권 교체는 이루지 못했지만, 시민의 요구가 관철되어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게 되었다는 점에서 결코 실패한 투쟁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영화 한 편을 보고 며칠씩 멍하게 있었던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고 나서 한동안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다룬 이 영화는 단순한 실화 영화가 아니라,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역사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택시운전사 김만섭(실제 인물 김사복)과 독일 기자 피터(실제 위르겐 힌츠페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날 광주에서는 정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평범한 택시운전사는 왜 광주로 향했을까
송강호가 연기한 택시운전사 김만섭은 처음부터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딸 하나 먹여 살리기 위해 오늘도 악착같이 핸들을 잡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죠. 최루탄이 터지면 익숙한 솜씨로 코밑에 럭키 치약을 바르고,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공부나 열심히 해"라며 꼰대스러운 잔소리를 늘어놓는 인물입니다.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서도 그의 첫 걱정은 "이러다 손님도 또 끊기는 거 아니야?"였습니다. 자기가 먹고사는 일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속물적인 사람이었죠. 하지만 저는 이 설정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공감이 갔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 않습니까? 가족 먹여 살리기도 벅찬데 세상 돌아가는 일까지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만섭이 광주로 향하게 된 건 순전히 돈 때문이었습니다. 거액 10만 원에 혹해서 독일 기자 피터를 태우고 광주까지 가겠다고 나선 것이죠. 1980년 당시 10만 원은 정말 큰돈이었습니다. 딸에게 새 운동화 하나 사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그를 광주로 이끌었습니다.
여기서 '계엄령'이란 국가 비상사태 시 군이 행정·사법권을 장악하는 초헌법적 조치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민간인의 자유와 권리가 제한되고 군대가 치안을 담당하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광주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나
처음 광주에 도착했을 때, 만섭의 눈에 비친 광주는 서울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밝은 햇살 아래 평화로워 보이는 도시였죠. 하지만 곧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마구 터지는 최루탄으로 화면은 뿌옇게 흐려졌고, 광주 MBC가 불타오르던 밤이 되자 도시 전체가 붉게 타오르는 지옥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1984년쯤 처음 접했던 광주 비디오 테이프가 떠올랐습니다. 당시에는 VHS 테이프 시대였는데, 복사를 거듭한 탓에 화면이 너무 흐릿해서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죠. 그런데도 그 영상이 주는 공포는 생생했습니다. 다른 공포 영화는 극장을 나오면 현실로 돌아오지만, 광주 비디오는 성당을 나와도 더 무서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영화 속 만섭도 그날 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직접 목격합니다.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을 쏘고, 곤봉으로 마구 때리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본 것이죠. 본인 또한 끔찍한 폭력에 희생당할 뻔했습니다. 여기서 '계엄군'이란 계엄령 하에서 치안과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투입된 군병력을 의미합니다. 1980년 5월 광주에는 공수부대를 포함한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었고, 이들의 과잉 진압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낳았습니다.
만섭은 도망치듯 광주를 빠져나왔지만, 평소 즐겨 듣던 유행가 가사조차 더 이상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날 본 광경이 악몽처럼 그를 괴롭혔죠. 송강호 배우의 연기가 빛나는 갈림길 장면에서, 마침내 울음이 터진 그는 딸의 이름을 부르며 핸들을 돌려 다시 광주로 향합니다.
한 사람의 용기가 역사를 바꿨다
유턴하는 순간부터 만섭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영화도 이를 여러 장면으로 강조하는데요. 딸에게 선물할 신발을 사 들고 집으로 향하던 만섭은, 광주로 돌아와 억울하게 희생당한 대학생 재식의 발에 그 신발을 신겨줍니다. 택시를 자기 몸같이 아끼던 만섭은 광주 시민들을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택시를 총알받이로 사용했죠.
여기서 저는 광주 시민들의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희망을 봤습니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도 서로를 위해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주고, 낯선 외국인 기자를 환대하며 "우리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달라"고 간청하는 모습 말입니다. 제가 가장 울컥했던 장면이 바로 도청 광장으로 가는 행렬이었습니다. 카메라를 든 외국인을 본 시민들이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느꼈을 고립감을 상상해보세요. 도청 앞에서 수백 명이 죽고 다쳤는데, 광주 MBC에서는 계속 쇼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외부와 연락도 끊긴 상황에서 광주 시민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그래서 이방인이라도 반가웠던 겁니다. 누구든 밖에서 와서 우리가 당하는 일을 세상에 알려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거죠.
실제로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촬영한 영상은 독일 공영방송 ARD를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되었습니다. 국내 언론이 침묵하고 있을 때, 한 외국인 기자의 용기가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알린 것입니다.
광주의 기억은 어떻게 전국으로 퍼져나갔나
광주 항쟁이 진압되고 관련자들이 감옥에 가고 군대로 끌려간 후, 몇 년간 침묵이 강요됐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도 진실은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이 만화 동호회라는 이름으로 몰래 광주 비디오를 상영했고, 이 영상은 VHS 테이프로 복사되고 또 복사되면서 전국으로 번져나갔죠.
저는 69년생으로 5.18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그때 뉴스에서는 "광주에서 폭도가 일어났다"고만 보도했습니다. 전주에 살던 저는 KBS 방송국 앞에 장갑차가 와 있는 걸 보고 신기해하며 구경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몰랐죠. 그게 얼마나 끔찍한 순간이었는지. 나중에 진실을 알고 나서야 그날의 장면들이 섬뜩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다른 지역 청년 학생들은 엄청난 죄책감과 부채 의식을 느꼈습니다. 광주가 혼자 싸우다 피를 흘렸다는 사실이 그들을 괴롭혔죠. 그래서 광주 비디오를 현실 밖으로 끌어내 전국적인 항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1987년 6월 항쟁입니다.
1987년 6월 10일,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을 때 광주는 처음에 조심스러웠습니다. '또 혼자 싸우다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트라우마가 있었던 거죠. 하지만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이번에는 고립당하지 않는다, 모두가 함께 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때 비로소 광주가 다시 불타올랐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결국 1987년 민주화의 밑거름이 되었고,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비록 야권 후보 분열로 정권 교체는 이루지 못했지만, 시민의 요구가 관철되어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게 되었다는 점에서 결코 실패한 투쟁이 아니었습니다.
총 평
영화 '택시운전사'는 비겁해지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했던 시대, 끝까지 비겁하기를 거부했던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기자는 진실을 보도했고, 평범했던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 딸을 안고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날 공항에서 헤어진 김사복과 위르겐 힌츠페터는 결국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그들이 지킨 진실은 역사가 되어 우리 곁에 남았습니다. 역사에는 우연이 없으며, 잊히는 것도 생략되는 것도 없습니다. 광주의 깊은 상처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