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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영화 리뷰 (롱테이크, 노 맨스 랜드, 사명감)
<1917, 샘멘데스, 전쟁영화, 롱테이크, 로저디킨스, 넷플릭스, 1차세계대전>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처음에 이 영화를 과대평가된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쟁 영화가 다 거기서 거기지"라고 넘겼는데, 막상 보고 나서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단 두 병사의 여정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스토리보다 그것을 담아내는 방식 자체가 관람 경험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롱테이크가 만들어낸 몰입감
이 영화가 다른 전쟁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컨티뉴어스 카메라 워크(Continuous Camera Work) 방식에 있습니다. 여기서 컨티뉴어스 카메라 워크란 편집 없이 카메라가 끊기지 않고 계속 따라가는 롱테이크 기법을 말하는데, 이 영화는 마치 전편이 하나의 컷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촬영 감독 로저 디킨스가 이 작업을 위해 배우들과 무려 4개월 동안 리허설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배우가 뛰는 속도에 맞춰 카메라가 실시간으로 따라가야 하고, 조명 변화까지 계산된 상태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어야 합니다. 제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영화를 다시 보니, 단순히 예쁜 화면이 아니라 엄청난 물리적 노력의 산물이라는 게 느껴졌습니다.
롱테이크 기법이 이 영화에 꼭 필요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편집이 들어가는 순간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다른 장면으로 넘어간다"는 안도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안도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블레이크와 스코필드가 철조망 저지선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관객은 그들과 함께 그 공간에 발이 묶인 채로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이 기법이 노 맨스 랜드라는 공간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이유입니다.
노 맨스 랜드, 현실이 된 지옥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게임이 유독 적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일부 게임 업계에서는 "교훈을 추출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저는 처음 이 표현을 접했을 때 무척 낯설었는데,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란 양측 전선 사이에 있는, 어느 편도 점령하지 않은 죽음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이 공간에서는 개인의 용맹함도, 뛰어난 전략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걸으면 죽습니다.
영화는 이 공간을 서양 문학의 오럴 히스토리(Oral History) 전통과 연결 짓습니다. 여기서 오럴 히스토리란 문자로 기록되지 않고 구술로 전해 내려오는 역사적 증언을 의미합니다. 샘 멘데스 감독이 할아버지 알프레드 H. 멘데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썼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무게를 다르게 만듭니다. 상상 속의 지옥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이 발을 디뎠던 공간을 재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소름 돋았던 장면은 시체가 여기저기 묻혀 있는 고요한 전선이었습니다. 폭음도, 총성도 없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이 장면 하나로 1차 세계대전이 왜 기존 전쟁과 달리 인간을 극도로 무기력하게 만들었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가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1차 세계대전의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철조망 저지선: 대규모 병력의 이동을 원천 차단하는 기술적 장벽
- 지하 갱도와 부비트랩: 적진에 진입한 순간부터 예측 불가한 위협
- 화력의 비대칭: 개인의 용기와 무관하게 죽음이 결정되는 구조
- 노 맨스 랜드: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죽음의 공간
사명감이라는 원동력
영화에서 스코필드는 처음에 이 임무 자체가 부담스러웠습니다. 뜬금없이 끌려나온 그는 블레이크처럼 특별한 이유도 없이 생사를 넘나드는 길에 오릅니다. 그런데 블레이크가 죽고 난 이후, 스코필드의 발걸음이 달라집니다.
1차 세계대전은 내러티브(Narrative), 즉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 매우 어려운 전쟁이었습니다. 여기서 내러티브란 사건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의지와 선택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 구조를 말합니다. 그런데 샘 멘데스 감독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공간에서도 내러티브를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형제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사명감이 그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단순한 전쟁 영웅담과 결정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코필드가 달리는 이유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동기가 다분히 개인적이고 인간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보편적인 공감을 끌어냅니다.
불타는 교회 앞에서 홀로 달리는 스코필드의 모습, 강물에 떠내려가면서도 나무토막을 붙잡는 장면. 이 장면들을 보면서 제가 느낀 건 단순한 감동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앞으로 나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불쑥 올라왔습니다. 전쟁터 같은 일상에서 우리를 계속 걷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보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 영화로 봐야 하는 이유
이 영화를 단순히 "잘 만든 액션 영화"로 분류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평가가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1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맥락 위에서만 작동합니다.
1차 세계대전은 산업혁명 이후 대량 생산 기술이 전쟁에 처음 본격적으로 적용된 사례입니다. 독가스, 기관총, 철조망이 동시에 사용되면서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고, 이는 기존 전쟁에서 중요했던 개인의 전투 능력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사 연구자들은 이 전쟁을 "최초의 산업화된 학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출처: 영국 국립전쟁박물관 IWM).
이런 역사적 맥락을 알고 보면, 영화 속 스코필드가 겪는 무기력함이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당시 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이 실제로 경험했을 공포와 혼란이, 롱테이크 카메라를 통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영화 비평 측면에서도, 이 작품은 2020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며 기술적 성취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출처: 골든글로브 공식 사이트).
제 경험상 이런 영화는 작은 화면보다 큰 화면과 좋은 사운드로 볼 때 체감이 완전히 다릅니다. 롱테이크와 음향 설계가 결합된 영화이기 때문에,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이라도 준비하고 보시길 권합니다.
총 평
1917은 전쟁의 비극을 어느 한쪽의 서사로 미화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속에 인간을 가장 깊숙한 곳에서 응시합니다. 이 모든 참혹함은 결국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발혈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모든 전쟁이 사라지기를 더 이상 누군가의 아들과 남편과 형제가, 그저 잿빛 땅 위의 한조각이 되지 않기를, 1917은 그 염원과 간절함을 한 번의 호흡 같은 영화로 우리에게 얀겨 줍니다.
이 영화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답이 없고, 승리도 없고, 영웅도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오히려 이 영화의 정직함이라고 봅니다. 1차 세계대전은 실제로 그런 전쟁이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국가나 명분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 하나를 위해 앞으로 걸었습니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으니, 한 번쯤 시간을 내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