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개봉한 《쉬리》는 62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당시 외화 흥행 기록까지 갈아치웠습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때 "이게 한국 영화 맞아?"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2000년대 이후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사실 그 출발점은 《쉬리》입니다.한국 영화가 바닥을 치던 그 시절극장에 갔다가 보고 싶은 할리우드 영화 좌석이 매진되면 "에라, 한국 영화나 보자"라고 체념하듯 선택하던 시절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도 그 시절을 경험한 세대인데, 솔직히 당시 한국 영화는 그런 취급을 받았습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무려 20여 년간 충무로는 사실상 침체기였습니다.당시 극장가를 지탱하던 건 스크린 쿼터제(Screen Quota System)였..
조금만 기다렸으면 됐는데, 참지 못해서 일을 더 크게 만들어버린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으신가요? 저는 영화 광복절특사를 다시 보면서 그 감각이 정확히 떠올랐습니다. 광복절 특별사면을 하루 앞두고 탈옥에 성공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들이 사면 대상자였다는 이 황당한 설정이 단순한 웃음을 넘어 인간의 조급함을 꽤 날카롭게 찌릅니다. 설경구와 차승원, 두 배우의 버디 코미디(Buddy Comedy) 호흡이 어떻게 이 아이러니를 완성시키는지 짚어봤습니다.두 캐릭터의 충돌이 만든 웃음의 구조버디 코미디(Buddy Comedy)란 성격이 정반대인 두 인물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면서 갈등과 웃음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장르 공식입니다. 여기서 '버디'란 단순한 동료가 아니라 서로를 끊임없이 견제하면서도 결국 의지하게..
대사 한 마디 없이 영화 한 편을 통째로 이끌 수 있을까요. 저는 솔직히 반신반의하며 《늑대소년》을 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송중기의 눈빛 하나가 그 어떤 긴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는 영화, 지금 그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송중기 연기 — 말없이도 심장을 건드리는 비언어 감정의 힘영화를 보기 전에 주변에서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대사도 없는 역할인데 볼 게 있겠어?" 저도 처음엔 그 말이 꽤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봐보니 그 걱정이 완전히 기우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철수라는 캐릭터는 비언어 커뮤니케이션(non-verbal communication)으로만 감정을 전달하는 인물입니다. 여기서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란 ..
전쟁 영화라고 생각하고 앉았는데, 두 시간 내내 숨을 제대로 못 쉬었습니다. 2007년 개봉한 《화려한 휴가》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총을 들 이유가 없었던 평범한 시민들이 왜 도청 앞에 섰는지를 담담하게 풀어낸 영화입니다. 국내 관객 730만 명이 선택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출연진이 만들어낸 입체적인 인물들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이 사람들이 연기하고 있다는 게 안 느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김상경이 연기한 택시기사 강민우는 과장된 영웅이 아니라, 동생 밥값 걱정하는 형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정치에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던 사람이 공수부대의 무차별 폭력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왜 아무 죄 없는 사람을 때리는가"라는 분노를 느..
제목 때문에 괜히 어려울 것 같아 미뤄두다가 어느 주말에 우연히 틀었는데, 결국 끝까지 보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2012년 개봉작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의 설렘과 엇갈림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개봉 당시 약 410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멜로 영화의 기준을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영화가 작동하는 방식 — 배경과 구조일반적으로 멜로 영화라고 하면 극적인 사건이나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건축학개론》은 제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 동력은 큰 사건이 아니라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침묵, 확인하지 않고 돌아선 오해, 그리고 그로 인해 아무 마무리 없이 끝나버린 관계입니다.영화는 비선형 서사(Non-linear Narrative..
네이버 평점 8.25점. 이 숫자를 보고 반신반의하며 2003년 영화 《오! 브라더스》를 틀었습니다. 처음 10분은 그냥 코미디겠거니 했는데, 다 보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웃음으로 시작해서 이렇게 조용히 무너지는 영화가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유산 조건이 만든 억지 동거, 그 배경보험회사 직원 오상우(이정재)는 딱 보면 압니다. 돈 계산 빠르고, 감정 소비 최소화하고, 가족이라는 단어에 별 무게를 두지 않는 사람. 제가 주변에서도 한두 명쯤 본 것 같은 그런 유형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버지 부고 소식에 고향에 내려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듣습니다. 이복동생이 있다는 것, 그것도 외모는 초등학생이지만 실제 나이는 스무디 넘은 성인이라는 것입니다.동생 오봉구(이범수)는 조로증(早老症, P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