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영화를 처음엔 그냥 흘려봤습니다. 2004년에 개봉한 가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을 줄은 몰랐거든요. 고등학생이 결혼이라는 황당한 설정인데, 보다 보면 어느새 화면에서 눈을 못 떼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문근영과 김래원이 만들어낸 온도가 그만큼 진했습니다.문근영·김래원의 연기, 직접 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제가 직접 다시 찾아봤는데, 이 영화에서 문근영의 연기는 지금 봐도 자연스럽습니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서보은이라는 캐릭터는 명랑하고 철없지만 가족을 진심으로 아끼는 소녀인데, 문근영은 그 감정의 결을 억지 없이 표현해 냈습니다. 특히 할아버지 앞에서 황당함을 참아내는 장면은, 대사 한 마디 없이도 얼굴만으로 감정이 전달됐습니다.김래원이 연기한 박상민은 군 제대..
학교 다닐 때 한 번쯤은 느꼈을 겁니다. 착하게 살았는데 왜 이렇게 억울하지? 저도 그 감각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인지, 《말죽거리 잔혹사》를 처음 봤을 때 유독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2004년 개봉작임에도 지금 다시 꺼내 보면 여전히 뭔가가 긁힙니다. 권상우의 분노가, 이정진의 눈빛이, 그리고 시대 전체의 체취가.권상우 연기 — 소년의 울분이 설득력을 가질 때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권상우에 대한 인상은 솔직히 '액션 배우'였습니다. 그런데 스크린 속 김현수는 달랐습니다. 이소룡을 동경하고 시를 끄적이는 소년. 강남으로 전학 온 첫날부터 힘의 서열이 엄격하게 작동하는 정문고등학교 현실과 부딪히는 그 표정이, 뭔가 연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권상우는 이 작품에서 이른바 캐릭터 아크(Chara..
처음 이 영화를 꺼냈을 때는 "그냥 싸움 잘하는 불량학생 이야기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는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2002년 개봉한 품행제로는 1980년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싸움 고수 조준필의 일상과 첫사랑을 그린 빈티지 학원 코미디인데, 웃음 뒤에 묘하게 쓸쓸한 여운이 남는 영화였습니다.1980년대 감성과 캐릭터: 시대 재현의 완성도품행제로를 두고 흔히 "학원물(學園物)"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학원물이란 학교를 주요 무대로 학생들의 일상, 갈등, 성장을 중심에 놓는 장르를 말합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봤을 때 느낀 건, 이 작품이 단순히 싸움 잘하는 학생들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일반적으로 학원물 하면 진부한 서열 다툼이나 폭력 장면이 주를 이룰 것이라 생..
저는 화산고를 처음 봤을 때 이게 한국 영화가 맞나 싶었습니다. 기공파(氣功波)가 날아다니고 학생들이 하늘을 나는 장면을 보면서, 이건 홍콩 무협영화거나 일본 만화를 그대로 옮긴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2001년에 개봉한 이 영화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 네이버 평점 7.14를 유지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야, 제가 이 작품을 너무 가볍게 봤다는 걸 인정하게 됐습니다.캐릭터: 리즈 시절 배우들의 집결지화산고에서 제가 가장 오래 기억한 건 스토리가 아니라 인물들이었습니다. 장혁이 연기한 김경수는 선천적 기(氣) 과잉, 쉽게 말해 태어날 때부터 제어 불가능한 에너지를 타고난 인물인데, 이 설정 하나로 8번 퇴학이라는 황당한 이력이 자연스럽게 납득됩니다. 당시 장혁의 카리스마가 그 설정을 억지스럽..
저는 이 영화를 처음엔 그냥 지나쳤습니다. '부산 양아치 고등학생 이야기'라는 한 줄 소개만 보고 뻔한 학원폭력물이겠거니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 꽤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배우 정우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독립영화 은, 개봉 당시엔 조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입소문을 타며 한국 청춘영화의 클래식으로 자리잡은 작품입니다.부산이라는 배경이 영화를 살렸다제가 처음 이 영화를 틀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이 사투리, 연기가 아닌데?"였습니다. 정우가 연기한 주인공 정국은 부산에서 자란 고등학생인데, 실제 부산 출신인 정우의 사투리 발화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처음 몇 분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이른바 로케이션 리얼리즘(location realism), 쉽게 ..
히어로 영화는 반드시 망토와 마블 로고가 있어야 할까요? 2009년 개봉한 영화 《전우치》를 다시 꺼내 보면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조선 시대 도사가 500년을 건너뛰어 현대 서울을 누비는 이 영화, 저는 개봉 당시에도 봤고 최근에 다시 봤는데 솔직히 지금 봐도 전혀 낡지 않았습니다. 강동원의 전성기 매력과 김윤석의 압도적인 악역, 거기에 유해진의 코믹 연기까지. 한국 판타지 블록버스터가 이 정도였나 싶어 새삼 놀랐습니다.한국형 히어로 영화의 배경과 맥락《전우치》가 만들어진 2009년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가 막 첫걸음을 뗀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감독 최동훈은 서양의 슈퍼히어로 문법을 따라가는 대신, 전혀 다른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바로 한국 전통 설화 속 도사 전우치를 현대로 소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