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다가 불편해서 멈춘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태양의 제국을 처음 봤을 때 딱 그랬습니다. 1987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이 작품은, 전쟁의 승패 대신 한 소년의 눈빛이 서서히 꺼져가는 과정을 두 시간 넘게 따라갑니다. J.G. 벌라드의 자전적 소설이 원작이고, 배경은 1941년 상하이. 카타르시스도 영웅도 없는 이 영화가 왜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지, 제가 직접 느낀 순서대로 정리해 봤습니다.계층 붕괴 — 하인이 뺨을 때리는 날영화 초반의 제이미는 상하이 공공조계(International Settlement) 안에서 자란 영국인 상류층 아이입니다. 공공조계란 19세기말부터 서구 열강이 중국 내에 설정한 자치 구역으로, 중국 법률 대신 서구식 행정과 치안이 적용되던 공간입니다. 쉽게 말..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냥 오래된 이탈리아 감성 영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1990년 개봉 이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동시에 받은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은, 영화를 사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30년 넘은 필름 조각으로 증명해 보이는 작품입니다.나이트레이트 필름과 영사기사, 사라진 직업의 기록제가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충격을 받은 건 극장 화재 장면이었습니다. 불길이 순식간에 퍼지는 그 장면이 단순한 극적 연출이 아니라는 걸, 나중에 찾아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극 중에서 알프레도가 다루는 것은 나이트레이트 필름입니다. 나이트레이트 필름이란 1950년대 이전까지 주로 사용되던 셀룰로이드 기..
아이가 말이 없으면 내성적인 성격 탓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일랜드 영화 '말 없는 소녀'를 보고 나서야, 침묵이 성격이 아니라 생존 방식일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보고 나서 며칠이 지나도록 마음이 가라앉질 않아서 결국 글로 남깁니다.정서적 방임 — 폭력 없는 상처가 더 오래 남는 이유아이에게 손을 대지 않으면 상처를 주지 않은 걸까요. 영화는 그 질문에 정면으로 답합니다.영화 초반, 아버지는 딸 코우트를 먼 친척집에 맡기러 가는 차 안에서도 불륜 상대처럼 보이는 여자를 태웁니다. "코우트가 몇 번째 아이냐"는 질문에 아버지는 "그냥 겉도는 아이"라고 답합니다. 딸의 가방조차 내려주지 않고 그대로 돌아가버리는 그 장면에서, 저는 위장이 조여드는 ..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남우조연상, 4개 부문 동시 석권. 2005년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거둔 성적표입니다. 복싱 영화라는 말을 듣고 처음엔 별 기대 없이 틀었는데, 다 보고 나서 한동안 소파에서 못 일어났습니다. 가슴 한편이 눌린 채로 수습이 안 되는 느낌, 그게 뭔지 이 글에서 풀어보려 합니다.이스트우드의 연출 — 말 대신 빛과 색이 말한다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연출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절제'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덜어낼수록 더 많이 전달된다는 역설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을 붙잡은 건 조명 방식이었습니다.이스트우드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의도적으로 구사합니다. 키아로스쿠로란 빛과 어둠을 극단적으로 대비시켜 피..
1973년 이후 미국에서 사형 판결 이후 무죄가 확인된 사례는 190건이 넘습니다. 이 숫자를 처음 찾아봤을 때, 저는 '그린 마일'의 존 커피가 떠올라 잠시 멍해졌습니다. 법적으로 완벽하게 집행된 처형이 도덕적으로는 살인일 수 있다는 것, 이 영화는 그 불편한 사실을 3시간 내내 조용하게 들이밉니다.존 커피가 보여주는 도덕적 딜레마일반적으로 사형수를 다룬 영화는 죄의 무게나 피해자의 고통에 초점을 맞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그린 마일'은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죄가 아니라, 죄를 판단하는 우리 자신에 있습니다.존 커피는 두 어린 소녀를 살해한 혐의로 루이지애나주 콜드 마운틴 교도소 사형수 간방에 들어옵니다. 1935년 대공황이라는 시대적 배경 위에서, 그의 ..
주인이 세상을 떠난 뒤 9년 넘게 매일 같은 자리에 나타난 개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솔직히 "설마"라는 반응이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파고들수록, 이건 미화된 전설이 아니라 신문 기사와 목격자 증언으로 남겨진 역사라는 걸 확인했습니다.9년의 기다림, 실화의 무게하치코는 1923년 일본 오다테에서 태어난 아키타견입니다. 아키타견이란 일본 아키타현 원산의 대형 토종견으로, 강한 충성심과 독립적인 기질로 잘 알려진 견종입니다. 주인은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교수였던 우에노 히데사부로로, 1925년 강의 중 뇌출혈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 하치코는 매일 도쿄 시부야역에 나타나 주인을 기다렸고, 1935년 3월 자신이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일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