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피로 맺어진 관계여야만 진짜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아버지의 부고 소식 하나로 시작해서, 혈연과 상처와 용서가 뒤엉킨 네 자매의 이야기를 카마쿠라라는 아름다운 바닷마을에 조용히 펼쳐놓습니다. 보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상처치유: 아픔을 나눠 짊어지는 방식에 대하여이 영화에서 죽음은 소란스럽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은 밥상머리 대화 주제로 등장하고, 세 자매는 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그 얘기를 합니다. 처음엔 이게 조금 낯설었는데, 보다 보니 오히려 납득이 됐습니다. 가정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슬픔이 이미 오래전에 끝났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서입니다.영화 속 자매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이게 왜 명작이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세계적인 스타와 평범한 서점 주인의 사랑이라니, 너무 뻔한 설정 아닌가 싶었거든요.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1999년 개봉작인 노팅힐이 25년이 지난 지금도 로맨틱 코미디(Romantic Comedy, 이하 로코)의 바이블로 불리는 이유, 결말까지 직접 곱씹어 보니 이제는 이해가 됩니다.줄거리와 명장면: 오렌지 주스 한 잔이 바꾼 것들영국 웨스트 런던의 노팅힐(Notting Hill)이라는 동네, 매달 적자를 면치 못하는 낡은 여행 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윌리엄 테커가 이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어느 날 세계적인 할리우드 스타 애나가 우연히 그의 서점에 들어오고, 이후 윌리엄이 거리에서 실수로 ..
170만에서 250만 명.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사라진 숫자입니다. 처음 이 수치를 접했을 때 저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영화 한 편이 그 숫자 뒤에 있는 얼굴들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1984년 작 '킬링필드'는 지금 봐도 불편할 만큼 생생하고, 그래서 꼭 봐야 할 영화입니다.제노사이드를 기록한다는 것의 무게영화는 뉴욕 타임스 기자 시드니 쉔버그와 캄보디아인 보조 기자 디스 프란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1970년대 중반 캄보디아는 론 놀 정부군과 공산 무장세력 크메르 루주 사이의 내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미군의 캄보디아 폭격이 더해졌습니다.이 폭격은 베트남전 당시 호치민 루트, 즉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차단하겠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작전이었습니다. 여기서 호치민 루트란..
개봉 일주일 만에 수백만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 '파묘'는 단순한 공포 영화가 아닙니다.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이게 무속 스릴러인 줄 알았는데, 보고 나서 알고 보니 역사와 오컬트를 이렇게 정교하게 엮을 수 있다는 사실에 꽤 오래 생각이 멈췄습니다. 등장인물 이름 하나에도, 여우 한 마리에도 의미가 있는 영화입니다.인물 이름 속에 박혀 있는 역사이 영화를 한 번 보고 나서 이름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무당 이화림, 제자 윤봉길, 풍수사 김상덕, 장의사 고영근. 처음에는 그냥 개성 있는 이름이려니 했는데, 알고 보니 이 이름들은 실제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김상덕, 고영근은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직접 썼고, 원봉 스님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서 따왔으며, 오강심과 박자해는 각각 ..
슬픔을 억누르는 게 더 성숙한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기쁘게 웃는 얼굴이 건강한 어른의 모습이라고 믿었고, 슬픔을 꺼내 보이는 건 왠지 약해 보이는 일 같았습니다. 그런데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을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영화 한 편이 오래된 착각을 조용히 무너뜨린 경험이었습니다.감정의 조화, 내면의 섬들이 무너질 때영화는 라일리라는 소녀의 머릿속에 다섯 감정 캐릭터가 살고 있다는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 감정들은 라일리의 본부에서 제어판을 조작하며 라일리의 행동과 기억을 만들어 냅니다.흥미로운 건 핵심 기억 구슬 이라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핵심 기억 구슬이란 라일리의 인격과 성격을 형성하는 근간이 되는 기억으로, 각각의 ..
쥐가 만든 요리를 먹고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요? 처음 이 질문을 들었을 때 저는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픽사의 2007년작 애니메이션 라따뚜이를 다 보고 나서는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누구나 요리할 수 있다'는 구스토의 모토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는 것을 레미라는 작은 쥐가 증명해내는 과정이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구스토 모토가 레미의 재능을 만나는 순간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를 위한 가벼운 이야기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라따뚜이는 어른에게 더 깊게 꽂히는 작품입니다. 특히 레미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재능과 환경 사이의 갈등'이라는 주제가 생각보다 날카롭게 다뤄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레미는 평범한 쥐들과는 달리 뛰어난 미각과 후각을 타고..
